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모리 아키나 (문단 편집) === 데뷔 초 (1982년 ~ 1984년) ===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 이후[* 음악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당시 다니고 있던 메이지 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곧 중퇴하였다.] 연예 기획사로 [[켄온]], 레이블로 [[워너 뮤직 그룹#s-3.3.3|워너 파이오니아]]와[* 정확하게는 워너 뮤직 재팬 산하 레이블인 "리프리즈 레코드"였지만 보편적으로는 워너 파이오니어라 본다.] 계약을 맺고[* 일본 연예계에서는 레이블과 소속사가 협업하여 연예인을 케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레이블은 음반 발매나 음반 홍보, 콘서트 등의 음악 관련 활동을 서포트해주는 역할이고, 소속사의 역할은 방송 스케줄이나 언론을 관리하는 등 가수 자체의 케어에 집중되어있다.] 1982년 5월 1일에 첫 싱글 [[スローモーション|슬로 모션]]을 발매하며 아이돌로 데뷔하였다. 원래 소속사 측에서 아키나를 '모리 아스나', '나카모리 아스나'라는 예명으로 활동시키고자 했으나 본인의 거부로 인해 본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출간한 에세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남이 시키는대로 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 때의 나는 사실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며 궁시렁대는 뒷말을 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쪽이 더 싫었다."][* 현재에 와서는 '아키나'라는 이름이 여자에게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키나'는 인기가 없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결국, 나카모리 아키나의 인기가 '아키나'라는 이름의 인식 개선에 도움을 주게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듯. 이러한 아키나의 사례 이외에도 인식이 개선된 사례는 많이 있다.] 아키나를 비롯해 [[코이즈미 쿄코]], [[하야미 유]], [[마츠모토 이요]], 호리 치에미 등 1982년에 데뷔했던 아이돌들이 연예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자, 이들을 통틀어 '''꽃의 82년조'''라고 일컫게 되었다. 수줍음 많은 실제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데뷔 전부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주관을 보였다.[[https://x.com/wowkina/status/986419096655822848?s=46|#]] [[https://x.com/wowkina/status/1223797570096394241?s=46|#]] 초창기부터 무대의상이나 소품, 메이크업 등을 본인이 하나하나 체크했으며 2번째 싱글이었던 [[少女A|소녀A]]는 가사가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가[* 인기는 끌었으나 그럴만 했다. 가사가 17살 미성년자 여자애가 어른을 꼬시는 내용(...).] 스태프들의 회유와 설득으로 녹음하게 되었다. 이러한 셀프 프로듀싱 또한 아키나의 인기 요인이었으며, 후일 [[DESIRE -情熱-|DESIRE]]의 디렉터였던 후지카와는 아키나에 대해 "깜짝 놀랐다. 그 당시의 [[레이디 가가]]였다."고 회고. 데뷔 싱글 '[[スローモーション|슬로 모션]]'은 가련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발라드로, 아키나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곡임에도 오리콘 주간 차트 30위가 최고 성적일 정도로 반응이 대단하지는 못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navertv(3327524, height=240)]}}}|| || '''데뷔 초 불량소녀 노선을 대표하는 곡, <[[少女A|{{{#fff 소녀A}}}]]>''' || 이후 츳파리(つっぱり), 즉 불량소녀 이미지가 가득한 두번째 싱글 '[[少女A|소녀A]]'를 통해 오리콘 주간 차트 5위에 오르고 [[더 베스트 텐]] 이나 [[밤의 히트 스튜디오]]와 같은 지상파 음악방송에도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뒤이은 세번째 싱글 '[[セカンド・ラブ|세컨드 러브]]'는 첫 싱글처럼 다시 가련하고 청순한 발라드로 회귀한 곡이었는데, 이 곡이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1위^^(3주 연속 1위 2회)^^, 1983년 연간 차트 8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적을 기록하고, 약 77만장을 판매해 나카모리 아키나 역대 최고의 판매실적을 올린 싱글로써 대히트하였다. 네번째 싱글 '[[1/2の神話|1/2의 신화]]'에서는 또다시 츳파리 노선으로 돌아와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발라드인 '[[トワイライト -夕暮れ便り-|트와일라잇 ~석양의 편지~]]' 2위를 기록하고, 츳파리로 돌아온 [[禁区|금구]]가 또 한 번 대박을 치면서 다시 1위를 탈환하며 1983년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1984년에도 '[[北ウイング|북쪽 날개]]'(2위)[* 자세한 내용은 [[北ウイング|북쪽 날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원래 1위여야 했으나 오리콘 측의 잘못으로 인하여 첫 주 판매량이 분할 집계되어 아쉽게도 2위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60만장을 파는 등 다른 싱글 못지않게 큰 히트를 기록], 후속 싱글 '[[サザン・ウインド|서던 윈드]]'(1위), 츳파리 노선의 집대성이라고 불린 '[[十戒 (1984)|십계 (1984)]]'(1위)까지 연속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 때부터 대중들은 아키나를 당시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었던 [[마츠다 세이코]]의 라이벌로서 주목하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